공지사항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춘계학술대회 및 총회 주제강연 한강중앙교회 유요한 목사 (2020년 11월 28일)

작성자
son0925
작성일
2020-12-06 14:51
조회
1586
주제강연 동영상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및 총회 주제강연
일시: 2020년 11월 28일(토)
장소: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강중앙교회

“위드 코로나 시대의 교회교육”
- 그 위기와 희망에 대하여 -
유요한 목사(한강중앙교회)
Ⅰ. 들어가는 말: 교회학교의 위기
교회마다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감리교회의 경우 교회학교 아동부 어린이의 숫자가 매년 만 명 정도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학교가 문을 닫는 것은 농어촌 교회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대도시에 있는 교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앞으로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학교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저출산 현상에 따른 인구의 감소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행정안전부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10월 현재, 우리나라 40대의 인구가 8,312,221명인데 비해서 0-9세의 인구는 4,005,030명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40년 동안 매년 십만 명 이상의 인구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구수가 줄어드는 만큼 교회학교 학생의 숫자가 감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아직도 70, 80년대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북을 치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돌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가 여름성경학교에 몰려오곤 했습니다. 몇몇 교사들의 헌신적인 수고만으로도 교회학교는 얼마든지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른 시대’입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40년 전의 아이들과 전혀 ‘다른 세대’입니다.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세대를 단순히 숫자로만 비교해서 평가할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현재 교회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단지 숫자가 줄어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구의 감소 현상이나 교육환경의 변화보다 훨씬 더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입니다.
Ⅱ. 믿음의 세대 계승 문제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세대 계승’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성경의 사사시대를 통해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믿음의 세대 계승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믿음이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삿2:10). 그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일차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세대에게 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세대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 없이 ‘믿음의 세대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주요 직분자조차도 자녀들의 신앙보다 대학입시를 우선시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래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고, 시험 기간이 되면 예배실이 아예 텅텅 비는 것을 봅니다. ‘부모세대’의 묵인과 방조 아래에서 ‘자녀세대’가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가 교회학교 위기의 일차적인 원인 제공자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이 될까요? 분명한 사실은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신앙의 교사로 세워지지 않으면서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사교육’이나 ‘교사 헌신예배’보다 ‘부모교육’이나 ‘학부모 헌신예배’가 더 필요한 형편입니다. 교회교육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부모가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주체로 세워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학교 교육이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신앙의 교사로 세워질 때까지 교회학교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학교는 부모가 데려다주는 아이들을 받아서 양육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학교 교육 자체에도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믿음의 세대 계승’은 아무리 잘해보아야 현상 유지로 끝납니다. 지금 대부분 교회가 역삼각형의 인구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교회학교가 아니라 아예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회학교는 단지 부모가 교회에 출석하는 자녀들만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할 책임도 있습니다. 문제는 요즘 아이들에게 교회학교는 관심 밖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오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일들이 세상에 쌓여 있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과열 경쟁이 교회로 나오는 발걸음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 70, 80년대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관심과 시선을 끌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시대는 교회학교 교육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간에 ‘새 포도주를 넣을 새 부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조금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만으로는 그들을 실제로 ‘믿음의 세대’로 세울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한 아이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려면 신앙공동체 전체의 양육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교회학교 교육을 전문 사역자의 책임이나 몇몇 교사들의 몫으로 떠넘기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믿음의 세대 계승’의 주체로 서야 하듯이, 교회에서는 신앙공동체 전체가 교육의 주체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믿음의 세대를 이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조만간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세상의 문화에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Ⅲ. 코로나가 가져온 새로운 위기
교회학교의 위기는 지금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 광풍으로 인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이 멈추어 서고 사회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모여서 예배할 수 없으니 다른 활동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특히 교회학교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가뜩이나 교회학교가 위축되어가고 있던 터에, 이제는 웬만한 교회에서 아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교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모 세대가 교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선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는 교회의 서투른 접근 방식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비대면 예배를 강요하는 정부 당국의 부당한 압력과 집에서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성도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져서 대부분 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뉴노멀(new normal)로 받아들였지요. 그러나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예배이든 녹화된 예배이든, 그렇게 모니터를 통해서 예배 실황을 시청하는 것을 감히 ‘예배’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예배를 보는 것’이거나 ‘설교는 듣는 것’이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청중(聽衆)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하는데, ‘온라인 예배’는 오히려 ‘예배자’여야 하는 성도를 ‘청중’ 내지는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는 일부 대형교회에서 ‘방송 선교’라는 명목으로 미디어 매체를 통해 설교나 예배 방송을 내보낼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입니다.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시청자 대부분이 기존 신자들입니다. 더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러는 다른 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궁금해서 봅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널을 돌려버리지요.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직접 가서 예배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저는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 교인’을 만들어내는 일에 ‘방송 선교’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온라인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매 주일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을 예견했어야 했습니다. 요즘 교회마다 현장 예배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을 둔 학부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직도 ‘코로나 염려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모두 교회에 나올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아무 비판 없이 덥석 받아들인 결과를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득이한 상황에서 어쨌든 ‘온라인 예배’가 교회의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았으니, 이제는 그에 발맞추어 ‘온라인 교회학교’나 ‘온라인 소그룹 모임’이나 ‘온라인 성도의 교제’ 프로그램을 서둘러서 개발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코로나 광풍이 잠잠해져서 현장 예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몸 사리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요?
그 어느 것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가는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전자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내 교회’ 없이 이곳저곳 떠돌면서 ‘온라인 예배’를 찾아다니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후자는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두 손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교회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현장 예배는 더욱 위축될 것이고, 그에 따라서 교회학교가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생존이 달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광풍을 견뎌내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 이유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한강중앙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을 교회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교회다움’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두 가지의 핵심 가치로 ‘교회다움’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성’(共同體性)과 ‘공교회성’(公敎會性)’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교회와 교회교육의 위기는 사실 코로나 팬데믹이 촉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공동체성’이나 ‘공교회성’의 핵심 가치를 소홀히 여길 때부터 이미 근본적인 위기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코로나에 대응하는 근시안적인 방식에서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본래의 양식을 되찾는 일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지역의 교회들이 서로 연대하여 믿음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공동의 책임을 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를 넉넉히 담아내는 ‘새 부대’를 준비하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Ⅳ. 신앙공동체가 함께 양육하는 교회학교
제가 섬기는 한강중앙교회의 교회학교가 시대를 선도하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다음 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 믿고, 그 일에 모든 목회적인 역량을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 이 세대의 아들들을 믿음의 자리로 이끌어오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동안의 흔적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학교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입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를 교회학교 교육의 주체로 세워가는 하나의 목회적인 실험으로서 ‘날마다 신바람나는 한강중앙교회 교회학교’의 실제 모습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이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학교 각부서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영아부는 ‘아기교회’로, 유치부는 ‘새싹교회’로, 아동부는 ‘샬롬교회’로, 중고등부는 ‘호산나교회’로, 그리고 청년부는 ‘실로암교회’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교회학교가 교회의 한 부속기관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자율적인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학교 각 부서를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나 청소년들 또한 그러한 교회 공동체 속에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교육을 교회학교 교육으로 제한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그 자체가 교육의 주체이며 또한 장(場)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에서 교회학교는 그저 교육적인 기능만을 담당하는 한 부속기관으로 취급되고 있고, 그 기관에서 몇몇 젊은 교사들이 헌신하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는 단순히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신앙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 제 분명한 확신입니다. 아이들을 단지 교육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들 또한 교회를 섬기고 예배하고 봉사하는 주체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용해 오던 교회학교의 각부서 이름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새롭게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부교역자들을 작은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세우고, 작은 교회로서 그 자체 내에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구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특히 교회학교는 무조건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예배가 중심이 되는 구조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어른 예배의 모방이나 대치가 아니라, 예배자들의 연령과 경험의 특수성에 따라서 그들에게 맞는 예배를 기획하고 또한 직접 아이들이 예배의 임사자로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 공간을 오직 그들만을 위한 예배실로 새롭게 단장해주었습니다. 또한, 크고 작은 선교와 봉사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직접 그 일에 헌신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각 부서의 활동이 단지 기존에 출석하는 학생들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게 했습니다. 새로운 멤버를 초청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을 찾게 했고,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멤버를 책임 있는 리더로 세워가게 했습니다.
예배의 경험이 교회학교 교육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이 예배에 대해 기대를 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교사에게나 아이들에게 예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재미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를 빨리 해치워야 그다음에 다른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에 임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지면서 오히려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수동적인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서 제가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은, 교회학교의 경쟁력은 바로 ‘예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이 세대와 경쟁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재미’(fun)로는 이 세대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하는 ‘즐거움’(joy)은 이 세대가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라도 우리는 교회학교를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인정하고 또한, 그렇게 세워가야 합니다.
2. 공동체 주일, 공동예배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세울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작은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 안에서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해서 모체가 되는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는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한강중앙교회’라는 모체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는 작은 지체로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목회의 비전과 방향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목회를 하기보다는 세대 간의 분열만 더욱 증폭시키거나 배타적인 소그룹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게 될 뿐입니다.
앞에서 저는 교회학교 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 저출산에 따른 인구의 감소가 아니라 ‘믿음의 세대 계승’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부모세대의 신앙이 자녀세대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드리는 ‘공동예배(Common Worship)의 상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예배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똑같이 공동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신앙공동체의 ‘한 지체’(a part)로 세워졌고, 그런 방식으로 믿음의 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점점 공동예배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교회학교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학교를 통한 체계적인 교육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아이들을 단지 피교육생, 즉 교육의 대상으로만 다루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예배’, ‘청소년예배’, ‘젊은이예배’와 같이 연령대별로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예배가 개설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몇몇 젊은 사역자와 교사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 것이고 실제로는 어른들의 관심 밖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70, 80년대에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교회학교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가 부흥했다고 해서 믿음의 세대 계승이 과연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학교는 다녔지만 실제로는 신앙공동체에 한 번도 소속된 적이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 중에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떠난 아이들이 오늘날 반(反)기독교 정서를 형성하는 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학교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걱정할 게 아니라, 차제에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신앙공동체의 공동예배를 경험하게 해주는 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현지인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 직접 참여해 보면서 우리와 다른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예외 없이 아이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순서에 ‘어린이를 위한 설교’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일은 교회의 크기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단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를 이어 나갈 지체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경험이 ‘공동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습니다. 경건한 예배의 분위기에 방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이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우가 한자리에 모여서 공동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달에 한 번씩(매월 두 번째 주일) ‘공동체 주일’(Community Sunday)을 정하여 아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함께 공동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예배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공동체주일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공동예배는 어른들 중심으로만 진행되지 않습니다. 모든 세대가 함께 참여하도록 골고루 기회를 줍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봉독이나 기도 순서에 교회학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특별찬양을 샬롬찬양대(아동부)나 호산나찬양대(중고등부)가 맡아서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절기예배에는 반드시 ‘어린이를 위한 설교’를 따로 하는데, 아이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그 설교를 경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가 공동예배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자리 모여서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고,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이와 같은 공동예배의 경험이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묶어 주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성찬 주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 번째 주일을 ‘성찬 주일’로 지키는데, 교회학교 아이들도 이 성찬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자신들의 공간에서 예배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도 성찬 예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추어 ‘시온예배실’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른들과 똑같이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고 난 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나머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이 또한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체로서 인정하여 세워주려는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은 교회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몇몇 사역자들에게만 떠넘기고 수수방관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공동체가 함께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사명입니다. 그 일은 이처럼 ‘공동예배’를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3. ‘가정 돌단예배’와 ‘인터렉티브 워십’(interactive worship)
이번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 교회는 두 가지 큰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교회에 함께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드려야 하는 ‘주일 예배’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모이더라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서 절대 부족하게 된 ‘교회 공간’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온라인 예배’를 받아들인 교회에서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단지 영상을 만들어서 송출하는 기술만 습득하면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온라인 예배’를 예배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우리 교회로서는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지난여름 수도권의 모든 교회에서 현장 예배가 금지되었을 때, 우리 교회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순교한다는 각오로 예배의 자리를 고수하거나 아니면 다른 교회처럼 ‘온라인 예배’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거나 해야 했습니다. 전자를 선택하자니 당국과 대립각을 세워야 하고, 후자를 선택하자니 지금까지 어렵사리 지켜온 원칙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회다움’의 핵심 가치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답이 바로 ‘가정 돌단예배’입니다. 가장(家長)이 제사장이 되어 각 가정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초창기의 ‘돌단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되새기며 소박하게 예배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예배 드리는 운동을 꾸준히 펼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도들에게 자녀의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며,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아쉽게도 ‘가정’이라는 상황을 고려한 말씀 묵상이 담긴 예배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52주 가정예배서’를 만들기로 하고, 2019년에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빌립보서 묵상)을, 올해는 ‘삶으로 풀어내는 믿음’(야고보서 묵상)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서의 안내에 따라서 가정예배를 드리도록 격려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예배에 대한 가장의 의지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가정 돌단예배’로 드리기로 하고 난 후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가정예배를 인도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각 가정에서 가장의 영적인 리더십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가정 돌단예배’를 우리 교회의 공동체적인 사건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매주 ‘교회 소식’과 ‘격려의 말’과 ‘축도’가 담긴 짧은 영상을 제작해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가족들과 함께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각 가정에서는 예배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목회사무실로 보내게 하고, 그에 따른 짧은 소감문을 남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편집하여 우리 교회 주보 ‘좋은 소식’에 실어 다시 각 가정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비록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다르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순서로 같은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예배드리고 있음을 서로 확인하면서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해도 오히려 공동체성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가정 대부분이 이 예배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현장 예배를 다시 시작했을 때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줍니다.
교회 공간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우리 교회의 핵심 가치인 공동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방법으로 접근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공동체 주일’을 정하고 모든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예배’를 드려왔습니다. 다음 세대로 믿음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공동예배의 경험이 필수적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한 공간에서 예배할 수 있었지만, 점점 비좁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동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회의 다른 공간에 흩어져서 모니터를 통해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와 같은 고민이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 깊어졌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서 교인 숫자가 마치 갑절로 갑자기 늘어난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공간이지만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예배드릴 방법은 없을까?”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예배방식은 없을까?” 오랜 고민 끝에 발견하게 된 단어가 바로 ‘인터렉티브 워십’(interactive worship)입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면 ‘상호작용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공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다른 공간에서는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동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예배방식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공간에서 동시에 ‘공동예배’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 센터는 시온예배실입니다. 많은 순서가 시온예배실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 진행되는 순서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층 샬롬교회에서 한 어린이가 성경봉독을 하고, 4층 호산나교회에서 새가족을 소개합니다. 지하의 실로암교회에서 봉헌특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공간의 예배 상황은 대형 모니터를 통해서 동시에 공유합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마치 한 공간에 있듯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교회의 현장 예배가 중단된 동안 우리 교회는 ‘인터렉티브 워십’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제로 이번 감사절을 공동예배로 드리면서 인터렉티브 워십을 제대로 구현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단지 부족한 공간 문제를 해소하는 방편 정도가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지체 의식을 일깨워주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각 공간에서 예배드리는 장면이 공유되면서, 아이들이 더욱 예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소통하면서 예배드린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모니터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이 제일입니다(고전13:12). 그러나 어쨌든지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 가치는 공동체성입니다. 코로나 광풍 속에서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가정 돌단예배’와 ‘인터렉티브 워십’의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4. 멘토링(mentoring)과 케어링(caring)
몇 해 전부터 우리 교회는 새로운 목회적 실험을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어른들이 교회학교의 아이들과 일대일(1:1)로 영적인 ‘부모-자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는 ‘멘토’(mentor)가 되고 믿음의 후배는 ‘멘티’(mentee)가 되어서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서 신앙을 지도하고 또한 양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은 교회학교 사역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한때 샬롬교회(아동부)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많은 아이가 호산나교회(중고등부)로 진급하여 올라왔습니다. 큰 기대를 하고 그 아이들을 잘 정착시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조직을 갖추고 교육비를 인상하여 책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아이들을 호산나교회에 정착시키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 믿음의 세대로 세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한 아이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신앙공동체 전체의 양육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내가 낳은 자녀만 내 자녀가 아닙니다. 만일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교회를 다니던 그 아이들을, 마치 내가 낳은 아이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 영적인 부모가 교회 안에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 반성에서부터 신앙공동체를 교회학교 교육의 주체로 세워가는 ‘멘토링’(mentoing)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그동안 ‘제자훈련 과정’을 통해서 양육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100일간의 행복한 동행’입니다.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이 기간에 ‘부모-자녀 관계’를 맺은 멘토와 멘티가 주일마다 일대일로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잡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멘토는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서 멘티를 격려해주는 미션을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교회에 왔을 때 반드시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부모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도 예외는 아닙니다.
‘멘토링’ 사역은 그 후에 어르신을 일대일로 돌보아드리는 ‘케어링’(caring)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 교회 어르신 중에는 혼자서 교회 나오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주일마다 반갑게 맞이하고 예배실로 안내해드립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함께 공동식사를 하면서 말벗이 되어줍니다. 주중에는 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손편지를 써서 보내드리기도 합니다. ‘멘토링’과 더불어 ‘케어링’ 역시 공동체성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의 하이라이트는 공동체 주일의 공동예배입니다. 멘토링 파트너와 케어링 파트너가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날은 파트너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자리를 미리 지정해놓습니다. 기념사진도 찍고 특별한 순서도 가집니다.
아무튼,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이유로도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부모와 함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소홀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100일간의 행복한 동행’은 매년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나니까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교회에 오면 반갑게 인사할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교회의 주일 예배를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드립니다. 오전 10시의 ‘이른비예배’와 12시 반의 ‘늦은비예배’입니다. 이른비예배는 예전 중심으로 드리는 ‘전통예배’입니다. 그리고 늦은비예배는 찬양 중심으로 드리는 ‘현대예배’입니다. 두 번 모두 제가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예배 사이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동체 시간’(community hour)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공동식사와 소그룹 모임이 진행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대예배’를 드리는 황금시간에 우리는 공동식사와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배의 시간을 변경한 데는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대가 다르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고, 결국 다른 교회에 다니는 것과 같게 됩니다.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니 반갑게 인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서먹한 관계로는 교회다움의 핵심 가치인 공동체성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무조건 예배를 나누려고 하는 목회자들을 더러 봅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설혹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예배는 자꾸 합해야 합니다.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교회 성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돌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힘든 일을 소수의 교회학교 교사들에게만 맡겨왔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씩만 책임지고 돌본다면 신앙공동체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맡겨진 ‘믿음의 세대 계승’이라는 사명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Ⅴ. 지역 교회가 연합하여 양육하는 교회학교
농어촌 지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학교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사실 두세 명의 아동과 한두 명의 학생들로 교회학교를 꾸려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전남 곡성군 지역의 몇몇 교회들은 발상을 완전히 바꾸어서 ‘연합 교회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주일날 아이들을 한 교회에 모이게 하여 연합으로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지요. 만일 개교회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사역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다면, 연합하여 그 일을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소속된 교회’가 아니라 ‘믿음의 세대 계승’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연합 교회학교’의 아이디어가 지금 우리에게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농어촌 지역처럼 생존 모드로 접근하는 통폐합의 방식이 아니라, 각 교회의 교회학교를 살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함께 모일 때에 서로 힘을 얻게 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神)바람나는 각 부서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것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각 교회학교를 부흥시키는 동력을 얻자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마포지방의 교회들이 함께 실시해 본 ‘연합 교회학교 프로그램’의 예입니다.
1. 어린이 풋살리그
아동부 어린이들은 뛰어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문제는 교회마다 그럴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육관 옥상의 공간에 풋살 축구장을 조성하고 싶다는 거룩한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투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귀한 결실을 얻고 있습니다.
마침 제가 마포지방 교육부 총무로 섬기게 되면서, 그 공간을 우리 지방 교회들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문득 지역 교회들이 함께 연대하면서 또한 자신의 교회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으로 저학년 아이들(1-3학년)의 풋살리그를 운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이 하기에는 공간이 너무나 좁고, 또한 지나치게 승부욕을 부릴 수도 있어서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인원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 한두 명 부족하면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친구를 데려올 수도 있고, 또는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한 팀을 꾸릴 수도 있습니다. 승부를 가리는 것보다 다른 교회 아이들과 함께 논다고 생각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풋살리그를 진행했을 때 많은 교회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다른 교회와 연합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2. 청소년 프레이즈 나잇(Youth Praise Night)
중고등부 학생들은 대부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지방 교회학교 연합회에서 주관한 ‘청소년 찬양제’에 참관하여 보니까, 교회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상하기 위해서 반드시 등수를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들이 참여하기에는 벽이 너무 높아 보였습니다.
사실 중고등부 학생들이 개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그런 활동을 할 만한 인원이나 장비를 갖춘 교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라도 한 자리에 함께 모이면 얼마든지 훌륭한 찬양 집회를 기획할 수 있습니다. 찬양팀이 조직되어 있는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직접 찬양 예배를 준비하여 인도하고, 작은 교회에서도 재능 있는 친구들이 특별한 순서로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지방 내의 많은 청소년이 참여하여 함께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속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면, 각 교회의 중고등부가 부흥하는 일에 큰 자극과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3. 청년 연합부흥회
교회마다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과중합니다. 교회학교 교사와 찬양대는 물론이고 이런저런 힘쓰는 일에 청년들이 동원되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청년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프로그램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쉽게 탈진하는 청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영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기에 충분한 인원이나 재정적인 뒷받침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청년들의 기를 살려주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그런 프로그램은 지방적인 연합행사로 기획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기성세대를 위한 연합부흥회는 매년 준비되고 있으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정성으로 청년들을 위한 연합부흥회를 기획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각 교회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 훌륭한 강사의 말씀을 들으면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그들의 영적인 필요가 채워질 뿐만 아니라 청년세대의 창조적인 능력이 분출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가지고 ‘마포지방 청년 연합부흥회’를 개최했고, ‘3인3색 Trinity 특강’을 개최했습니다. 또한, 그 모임을 통해서 ‘마포지방 기독청년 문화축제’라는 후속 프로그램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마다 ‘돕는 배필’을 만나지 못한 청년들에게 만남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 행사가 진행되었을 때 훨씬 더 많은 청년이 참여하여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학교의 위기는 ‘공동체성’(共同體性)과 ‘공교회성’(公敎會性)을 잃어버린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오직 개교회의 부흥만 생각하는 ‘개교회주의’로는 죽어가는 교회학교를 다시 살려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교회학교의 위기는 지방적으로 또한 연회적으로 교회가 함께 연대하여 힘을 모으지 않고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파고(波高)입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제안들이 유일한 처방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연합 교회학교 프로그램’이 창조적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공교회성의 회복과 아울러 교회학교를 되살리는 이중의 결실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Ⅵ. 나가는 말
교회학교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생존을 위해서도 꼭 부흥되어야만 합니다. 부흥하더라도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공교회성’을 회복함으로써 부흥해야 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의 숫자만 늘리는 것이 부흥은 아닙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고 ‘믿음의 세대’로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국교회와 교회학교에 심각한 충격을 주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믿음의 세대 계승’의 주체로 서고, 교회에서는 신앙공동체 전체가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주체로 세워지고,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이 일에 공동의 책임을 지기로 작정한다면, 교회학교는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부흥을 일구어내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강중앙교회의 교회교육 현장 이야기가 ‘위드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우는 하나의 씨앗으로 이 땅에 심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